코모두

서울의봄 오진호 역할,정해인 김오랑 소령 프로필 중령 부인 아내 배영옥 나이 고향 본문

카테고리 없음

서울의봄 오진호 역할,정해인 김오랑 소령 프로필 중령 부인 아내 배영옥 나이 고향

센토스 2023. 11. 29. 20:16

출생
1944년 4월 5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남역리

사망
1979년 12월 13일 (향년 35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거여동 육군특수전사령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2923호

배우자 아내 부인
백영옥
학력
김해 삼성국민학교 (졸업)
김해중학교 (졸업 / 10회)
김해농업고등학교 (졸업 / 34회)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과거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9년 ~ 1979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25기)
최종 계급
중령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육군특수전사령관 전속부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
병과
보병

상훈
보국훈장 삼일장
참전
베트남 전쟁

'서울의 봄' 유족 "정해인, 故 김오랑 중령과 닮았다"
- 2023. 11. 28

고(故) 김오랑 중령 조카 김영진 씨가 '서울의 봄'에 출연한 배우 정해인을 보며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27일 온라인 채널 'JTBC News'에는 '참군인 고 김오랑 중령 재조명'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해당 영상에서 김영진 씨는 "(정해인이) 얼굴 자체가 삼촌 젊었을 때랑 많이 닮았다"며 "베레모를 쓰니 생각이 많이 나더라"며 삼촌 김오랑 중령을 회상했다. 

'서울의 봄'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의 12.12 군사 반란과 서울의 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극 중 정해인은 특전사령관 공수혁(정만식 분) 소장의 비서실장 오진호 소령 역을 연기한다. 오진호 소령 역은 김오랑 중령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김오랑 중령은 12.12 군사 반란에서 권총 한 자루를 가지고 반란군에 맞서다가 숨졌다. 그는 소령이었지만 사후 중령으로 추서됐다. 김영진 씨는 '서울의 봄'의 큰 인기 덕분에 "(삼촌과 12.12 군사 반란이)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다 아는 계기가 됐다"고 얘기했다. 이에 그는 영화를 제작한 김성수 감독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답니다. 

'서울의 봄'은 27일 기준 누적 213만 관객을 돌파하며 어려워진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지난 22일 개봉 이래 6일만의 성적으로, 손익분기점 460만 명은 물론 '천만영화'에 등극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서울의 봄’ 정해인 “故김오랑 중령과 많이 닮아”, 군사반란에 맞서는 강렬 카리스마 "236만 돌파
- 2023. 11. 29

영화 ‘서울의 봄’이 6일만에 2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폭발적 흥행세를 보이는 가운데 극중 오진호 소령을 열연한 배우 정해인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오진호 소령은 실제 인물이었던 고 김오랑 육군 중령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캐릭터입니다.

김오랑 중령의 조카 김영진 씨는 27일 JTBC와 인터뷰에서 “정해인이 삼촌 젊었을 때 얼굴과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그는 “얼굴 자체가 삼촌 젊었을 때하고 얼굴이 좀 많이 닮은 형태라, 베레모 쓰고 해놓으니까 생각이 많이 났다”고 밝혔다.

그는 삼촌을 살해한 박종규 중령이 임종 직전 남긴 말을 언급하기도 했다. 김영진 씨는 "(박종규 중령이) 자기가 죽으면 '오랑이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마음이 그렇다"고 말했답니다.

이어 “우리나라 국민이라고 하면 다 아는 그런 계기가 됐으니까 이 영화 만든 사람한테 고맙다고 이야기나 한번 해달라”고 전했다.

당시 소령이었던 김오랑은 상관이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는 신군부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탄을 맞고 숨졌다.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다. 사건 이후 부인은 시력을 잃은 채 유명을 달리했고, 부모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서울의 봄’에서 정해인이 연기한 오진호는 같은 특전사임에도 사령관을 제압하러 들이닥친 4공수 여단의 공격에 끝까지 특전사령관(정만식 분)의 곁을 지키는 용기 있는 인물이랍니다.


정해인은 짧은 등장에도 강렬한 존재감과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는 첫 등장부터 강인한 눈빛과 카리스마,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자세로 특전사 역할에 완벽히 몰입했다. 또한 위기 속에서도 단단한 목소리와 충성심 강한 눈빛으로 캐릭터의 서사를 차곡히 쌓아가며 눈을 뗄 수 없는 열연을 펼쳤다.

신군부 군사반란에 맞섰던 군인
- 2014. 3. 9

뒤늦게 이원준·김원철의 <김오랑-역사의 하늘에 뜬 별>을 읽었다. 김오랑은 1944년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좋은 쇠는 못이 되지 않고 좋은 사람은 군인이 되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부모에게서 들었던 나라 없는 설움과 그가 일곱 살 때 체험한 한국전쟁은 김오랑을 육사로 이끌었다. 이처럼 그 당시 육사를 지원한 생도 가운데는 조국의 초석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을 가진 이가 많았답니다.

1965년 육사 제25기 생도가 된 그는 1969년 졸업과 함께 육군 소위가 됐고, 이듬해엔 베트남으로 파병되어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그곳에서 펜팔을 통해 부산의 여대생 백영옥을 사귀고 14개월 만에 귀국하여 결혼했습니다.

그 후 특전사 중대장을 맡았던 그는 육군대학을 수료한 1979년 편한 보직을 마다하고 또다시 특전사 배속을 자원한다. 야전 지휘관을 원했을 그에게 내려진 최종 보직은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다. 사령관 비서실장은 진급의 자산이 된다지만, 여러 증언을 들어 보면 그는 천성이 성실하고 임무에 충실한 무장이었지 정치군인이 될 수 없었답니다.

같은 해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을 당했다.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꿰어 찬 전두환과 신군부는 급하게 <5·16교본>까지 만들어 회람하면서 정권 찬탈 음모를 꾸몄다. 그런 기미를 감지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을 벽지로 좌천시키려고 하자 불법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하극상을 벌인 게 12·12 사건이다. 전두환은 정승화를 체포하기 위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협조를 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특전병사로 구성된 체포조를 특전사령부로 보냈다.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6발의 총탄을 맞고 사령관실에서 즉사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확정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군사반란을 막으려다가 희생당하거나 강제 전역을 당한 군인들에게 포상을 해야 맞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군인이 정도를 따르며 생명까지 던져 나라를 지키겠는가? 2009년부터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을 위한 청원이 이어졌으나 국방부의 몽니로 무산되다가 최근 보국훈장을 추서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무공훈장 추서와 육사 안에 추모비(동상)를 세우는 것은 기각됐습니다.

이 책은 국방부의 거부 논리를 정밀하게 논박하고 있지만 최종 목표는 서훈이나 추모비 건립이 아니라, 김오랑 중령의 순직을 국방부의 정훈교재 삼아 참군인 상(像)을 세우는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