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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56)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교수는 1980년대 한국유도의 간판스타였답니다. 그는 계명대 2학년이던 1984년 화려하게 등장했답니다. 당시 LA올림픽 남자 60㎏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1986 서울아시안게임과 1987 세계선수권대회, 1988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답니다
김 교수는 기술로 승부를 보는 경량급에서도 손꼽히는 테크니션으로 꼽혔다. 주특기인 허벅다리 걸기와 빗당겨치기는 물론 모든 유도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김 교수는 계성고 재학 시절 100연승 이상을 올렸고 고교 3학년이던 1982년부터 은퇴를 결정한 1988년까지 붙박이 국가대표였다.
김 교수는 지난 3월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 출연했고 50대이면서도 뛰어난 운동 능력을 뽐내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는 은퇴한 뒤 30년 가까이 축구를 즐겼다. 배우 최수종, 이덕화 등이 몸담은 연예인축구단 일레븐 FC에서 25년째 활약하고 있다.
김 교수를 지난 11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동서울대에서 만났다. 그는 “은퇴하고 32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스포츠 선수가 묻히지만, 방송에 불러줘 고마웠다. 예능프로그램 등 방송 출연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높이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복싱을 즐기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대구남산초 2학년이던 1972년 축구를 시작했지만, 예산 문제로 축구부가 해체하면서 1974년 유도로 방향을 틀었다. 대구중앙중 재학 시절까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김 교수는 “중학교 때까지 실력이 부족했고, 성적은 좋지 않았다. 유도 기량이 뛰어난 친구의 ‘덤’으로 대구계성고에 입학했다. 그래서 방황하곤 했다. 유도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러다 고교 2학년이 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다간 죽도 밥도 다 안 된다는 절박함이랄까”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악바리’로 불렸다. 훈련량이 많았고, 매트에 오르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얻은 별명. 기량은 나날이 발전했고, 그는 ‘기피 대상 1호’가 됐다. 김 교수는 “다른 사람이 잘 때도 땀을 흘렸다. 하루 평균 4∼5시간씩 더 훈련했다.
피 같은 땀을 흘린 덕분에 고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국내대회에서 100연승 이상을 거뒀고 3학년 말엔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당시엔 고교생의 대표 선발전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100연승을 돌파한 괴력의 소유자를 그냥 둘 순 없었다. 그리고 선발전에서도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김 교수는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모두 19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울올림픽이 마지막 금메달.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LA올림픽 결승전에서 패한 뒤 4년간 앞만 보고 달렸다. 국제무대를 휩쓸었지만, 정작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기에 압박감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김 교수는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고, 서울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른 뒤 은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혹독한 훈련을 자청했고, 잘 견뎌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마지막 금메달을 손에 쥐었다. 모든 선수가 정상에서 은퇴하길 바란다. 난 꿈을 이뤘다. 당시 코칭스태프, 동료, 선후배들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역 시절 뛰어난 ‘쇼맨십’을 뽐냈다. 은퇴 무대 역시 마찬가지. 김 교수가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1988년 9월 25일은 추석이었고, 그는 명절 저녁 TV 앞에 모인 국민에게 값진 금메달을 바쳤다. 그는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 교수는 “마침 추석날이었기에 결승에서 이기면 한복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은퇴이니. 하지만 시상식 이후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국가대표 유니폼, 신발을 착용하지 않아 후원사가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은퇴했다. 그런데 시련이 이어졌다. 은퇴 직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1996년 5월 열린 애틀랜타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판정 시비로 유도계를 떠났다. 당시 한국마사회 코치였던 김 교수는 76㎏급에서 제자 윤동식이 조인철에게 판정패하자 항의했고, 한 달 후 대한유도회로부터 유도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연금 중단 징계 처분을 받았다.
김 교수는 “당시 학연에 따른 편파 판정으로 제자가 불이익을 받았고 재판까지 이어졌다. 나 역시 유도계의 주류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에 더는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새로운 직장을 찾는 곳마다 압력이 들어왔다. 그렇게 유도와 멀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장에서 물러나 학업에 몰두했다. 현역 시절에도 공부를 즐겼고 은퇴한 뒤 교수가 되길 원했다. 은퇴 직후인 1989년 국민대 대학원 체육학과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도자로 활동하던 1993년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임용은 매번 무산됐다. 유도계는 주류에 저항한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유도계의 압력 때문에 그는 팀, 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진로가 막히자 김 교수는 사업에 손을 댔다. 그런데 사회는 냉혹했다. 운동선수, 지도자, 그리고 강사 경력은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가 터졌고, 사기까지 당했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모두 잃었고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