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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후손 아들 자녀 부인 아내 결혼 나이 고향 죽음 본관 본문
이완용은 1926년 죽기 전 아들에게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였답니다. 이완용은 유언을 남긴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13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답니다.
이완용은 매국노인 을사오적 중 한 명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채결, 고종황제 강제 퇴위,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 등을 체결한 인물이다. 이완용의 재산은 광본 전까지 여의도 면적의 7,7배의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완용은 전국 각지에 땅을 안 갖고 있는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땅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러일 전쟁 이후 전북에 진출한 일본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기기 위해 전북 땅을 집중 매입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완용 후손들은 지난 1992년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땅이 자기들 땅이라면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 승리하면서 이완용의 재산을 대물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답니다.
** 이완용은 누구?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폐망시켰다.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답니다.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며, 일본제국에서의 작위는 후작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内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그는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 및 방치되다가 1979년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화장되었답니다.
** 그의 최후
1909년 이재명의 암살 미수 사건 때 폐에 상처를 입은 뒤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咳嗽)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일본에서 의사들을 불러 그 후로도 계속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으나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몸과는 반대로 그의 재산은 늘어나기만 했는데, 특히 땅 재산은 1억 3천만 평까지 불어났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왕을 제외하고 가장 부자라는 소문까지 있었지만 폐렴과 해소 증상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흉통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해졌답니다.
1925년에도 가을까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명승지 물염적벽을 유람하고 11월 하순에는 순종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다시 해소가 심해져 12월 5일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의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묘에서 열린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오래전 유실됐던 시조 이공정의 묘를 이완용이 손수 이것저것 챙겨 드디어 개축공사를 끝내고 원래 직접 제사를 지내려하려 했으나, 지병인 기침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답니다.
그후 얼마간 집에 들어앉아 요양을 해 어느 정도 호전됐다. 그래서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하게 된다.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조선 귀족 등록관청인 중추원도 새 청사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새 청사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 초대 총독이 입안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전 총독(2대)이 착공한 이래 9년만에 완공을 본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답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도 참석한다고 해서 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 부축을 받고 귀가 후 밤이 되자 기침이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고, 이내 졸도해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이완용은 옛 주인이 보낸 적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