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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사망자 70주년 원인 기간 언제 휴전일 시간 본문
6.25 전쟁, 한국전쟁 또는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답니다.
6.25 전쟁의 평화 협정(Peace treaty, 강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현재까지 진행 중인 전쟁이지만 남북 양측의 시민들은 전쟁 진행중이라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
남북의 지도자가 전쟁 상대인 적국 원수(元帥)를 만나고 스포츠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등의 일도 이러한 특수한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6.25 전쟁의 휴전 기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전쟁이다.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국은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의 침공 동기에 대한 통일된 정설은 아직 없다. 다만, 2010년 이후 국지전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6.25 전쟁을 외적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기원(내전의 확대)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기원설이 국제적으로 힘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6.25 전쟁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기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수정주의적 관점이 대세였으나, 소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된 지금은 김일성의 남침야욕이 전쟁의 주 원인이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다. 소련에서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중국군으로 위장한 파일럿들을 일부 보낸 바 있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확전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무시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다.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까발려져 명예를 실추당한다.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 뿐만이 아니었고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을 통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까봐 크나큰 내적 괴로움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1][32] 양쪽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1~5공화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국시로 삼았던 반공, 북한은 남조선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국가 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생긴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